김욱규 작가 연보 중앙 갤러리 화보 발췌 1991

作家 年譜

1911.1.16 

함경남도 함흥시 지장리에서 무진회사(금융회사)를 운영한 부친
김석엽과 모친 박희정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남동생은 서울대 약대 중퇴로 현재 브라질 상파울로에 거주)


1929 

함흥 보통학교 졸업


1930

서울 보성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인 선생과 다투다가 폭행하여
퇴학을 당했고 경신학교에 재입학하여 도상봉(함흥보통학교
선배)에게 그림을 배우다.


1933

渡日하여 가와바다(川端書) 미술교습소에서 김흥수와 함께 수업


1937

문화학원에 입학.2년 선배인 이중섭과 하숙생활을 하기도 했음.


1938

독립미술협회전에서 특선 (‘가네모도 교게이’ 라는 일본명으로
출품했고, 작품명은 「시매스」(示))
당시 특선작 이상은 원색의 그림엽서로 발간되었다.북에 두고 온
부인이 당시에 이 엽서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림은 만주의 어느 고급 술집 안에 앉아 있는 두 인물을 그린
실내 인물화.젊은 여자가 붉은 한복 웃저고리를 입고 앉아 있고
뒷모습만 보이는 남자가 다소곧이 앉아 있는 여인의 가슴팍을
손으로 가리키는 장면이었음.슬프거나 좌절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암시적인 그림.


1939

이과전 입선 (「가네모도 교게이」라는 이름으로 출품)


1940

귀국하여 함흥에서 한미혜와 결혼
부인은 함흥의 최고 명문으로 한국인 입학이 어려웠던 일본인
학교 「함흥 고녀」 출신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당시 장인은 안변
군수를 지내다 신흥 군수로 발령,재직 중이었다.
결혼 후 3남 1녀를 두었다.


1941

함흥 금융조합에 다니다가 큰 아버지가 창설하고 고종사촌이
운영하던 「가마스 주식회사」(가마니를 짜는 큰 회사)에 취직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1944

일제 패망 직전에 징용에 끌러가 단천 탄광에서 부역에 종사하
다 해방이 되어 고항으로 돌아음


1946 

함흥 여자 실과중학교에 동경미술학교 출신인 김흥수와 함께
교사로 부임.(남한에서 재혼한 부인 엄춘절의 여동생이 당시에 이
학교를 다녔음)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한 한상익(17년 생.동경미술학교 출신,
평양미술대학 교수,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 역임, 북에 생존),
박영익(일본대학 미술학부 출신, 재북. 생존미상), 김형구(동경제국
미술학교), 이수억(동경제국미술학교) 등과「함흥미술연구소」 설립.
이 연구소는 6.25 전까지 계속되었음.

함흥미술동맹 관사의 2층에 위치한 천정인 높은 공간을 작업실
로 사용했는 데 이 공간은 일제 시대에 사진관(‘사자누마」라는
멍칭의 사진관)으로 쓰였다.이 연구소는 미술학교와 학원의 중
간형태로 당시 학생은 미술학교를 다니던 학생들과 취미섕들로
이루어졌다. 당시 양화가 김태(서울대 교수), 김충선(작가) 등이
이 연구소 학생이었고, 김태의 나이가 15새었다.


1947

함흥여실을 그만 두고 「함남고급중학교」(현재의 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김형구는 중학교에 부임) 김태와 필주광에게 미
술을 지도.(김태가 당시 미술반장을 함)
사회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과 함께 미술제도 역시 개펀되고
있었고 이때 「문총」 산하에 있는 「함흥미술동맹」의 위원장으로 있
던 박영익이 「평양미술동맹, 서기장으로 전보 발령이 나자 노동당
당원의 신분으로 후임에 임명됨.(이때 김형구가 고급중학교로
자리를 옮김.) 그는 좌익사상에 동조하지 않았고 자신의 예술이념이
당에서 내세우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맞지 않아
고민하다가 8개월 만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난다.
이후 그는 직업이 없이 그림만 그렸고, 숙청대상의 명단에 올
라 피신생활을 하기도 했다.


1950.12 

모친이 월남을 완강히 거부하고 부인은 임신중이라 단신으로
두 동생과 함께 흥남부두에서 미군화물선 L.S.T을 타고 월남함.
(배안에서 김형구를 우연히 만나게 됨)


1951

대구에서 올라와 고향에 가까운 속초에 정착.


1952

함경남도 이원 출생인 엄춘절과 재혼.(부인은 당시 군부대 야
전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 양화가 이철의 소개로 재혼을 함.)
슬하에 2남 2녀를 둠.(장남 김선극,차남 김선봉, 장녀 김선미
, 차녀 김선혜)


1954 

국전에 양화 3점을 출품했으나 낙선.이후 그림을 멀리 함.


1955

송탄에 정착하여 초상화를 제작하며 생계를 유지.


1965 

무렵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틈틈히 그림을 다시 시작함.


1971

삼각지로 이사한 후 본격적으로 예술세계에 몰두.
조선화랑애서 잠시 商電를 제작했으나 뜻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미8군 영내 ART AND CRAFT MOYER에서 미술교습을 하던 중 초기
앵포르맬 운동에 참여했던 추상화가 필주광(그는 평소에 김욱규
화백에게 그림을 계속 하시도록 종용)이 40세에 교통사고로 요
절하자 큰 충격을 받았고, 화가는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결심하여 이때부터 모든 일자리를 던져버리고 미술에만 정진함.


1980 방배동으로 이사.
1982 부천으로 이사.
1990.11.4 노환으로 타계.


1991 

제1회 김욱규 유작전 (중앙화랑 11.01~11.12)
「현대미술 100인건」 출품
「함경남도 도민전, (1회,2회)


1992

제2회 김욱규 유작전 (갤러리21 12. 08~12.17)


2025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04.17~07.06)